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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상대사와 지엄화상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617년~686)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가다가 원효는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깨달아 돌아오고
의상은 혼자 종남산 지상사 지엄화상 문하에 들어간다. 지엄화상이 꿈을
꾸었었는데 해동에서 큰 나무가 자라더니 중국 땅 천지를 덮는 꿈을 꾸고
의상이 지상사(至相寺)에 도착한다. 지엄문하에서 공부하기를 9년 마침내
지엄화상이 공부의 결과물을 제출하라고 명한다. 의상은 대승장(大乘章)
10권을 찬술한다. 지엄화상은 뜻은 매우 깊고 아름다운데 부처님의 뜻과
같은지 알아봐야 겠다고하면서 장작불을 피우더니 “부처님 뜻에 틀림없이
꼭 맞는 다면 타지 않게 하소서” 했더니 모두 타고 210자가 남았다. 그것을
모아 다시 불속에 던졌더니 타지 않았다. 의상은 두문불출하고 일곱 글자
30구절 게송과 도인을 만들었다. 이것이 유명한 “법성게”이다. 법성은
우리들의 마음이다. 왜 법성인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인식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법성이라 한다.
2. 당나라 침공
668년 신라와 손잡고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 시킨 당나라는 이제
신라까지 넘보게 된다. 당나라는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간섭하였다. 신하들은 당나라와 일전을 불사하자고 문무왕께
건의 했지만 일단 김흠순(김유신의 친동생)과 김양도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힘을 기르자고 한다. 드러나 당나라는 두 사람을
집에 가두고 외인출입을 금지시켰다. 죄목은 “신라가 감히 당과 맞서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에 철궁 기술자 구진천을 데리고오라 명한다.
구진천이 만든 철궁은 활을 쏘면 1천보(사람의 걸음으로) 멀리 날아가는
화살이었다. 당은 아직 그런 화살이 없었다. 당나라에 온 구진천은 화살을
만들지 않고 지연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토번(티벳)을 공격이 끝나면
신라를 침공하고자 군비를 군량을 비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구진천은 갇혀있는 김흠순과 김양도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김흠순은
서찰을 만들어 지상사 의상스님에게 보낸다. 의상은 얼른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3. 명랑법사와 사천왕사
서기 670년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가진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통력이 뛰어난 신인종(神印宗)의 명랑법사를 불러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외워서 적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건립하고자 했지만 시간이 없자 비단으로 휘장을 쳐 절을 만들고 풀을 엮어서
불상을 급조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문두루비법은 진언, 다라니, 무드라,
주력이라 하는데 내 마음속의 진실한 언어가 주력이고 문두루비법이다.
신라사람들의 염원과 불력으로 당나라 수군은 바다의 풍랑을 만나 거의
전멸하고 몇 척만 살아 돌아갔다고 전한다.
범어사는 서기 678년 신라 문무왕 창건된 사찰이다. 서기 2010년은 범어사가
건립된지 1332년이다. 동해 바다에 왜적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태백산
부석사에 머물고 있던 의상대사를 모시고와서 금정산 아래 7일7야를
화엄신장님께 기도했더니 미륵여래가 나타나고 화엄신장이 병기를 들고
사람으로 나타나서 외적을 무칠렀다고 전한다.
이때는 불력으로 외적이나 외침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범어사는 이처럼
출발부터 호국사찰 진호국가의 의미를 가지고 출발한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도 삼국유사 진본을 구입하여 스님들이 읽고 범어사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운동을 고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4. 의상과 도선율사
의상대사가 종남산 지상사에 있을 때
정업사(淨業寺)에 도선율사(道宣律師 : 596~667)가 있었다. 율사는 청정하게
계율을 지켜셨다. 점심에는 항상 하늘에서 천인이 천공을 가지고 오는데
그 공양을 받아 드셨다. 어느날 의상대사를 초총하고 천공을 기다렸는데
때가 지나도 천공이 오질 않았다. 의상스님은 “불심이 부족한 제가 있어서
천공이 오질 않는 것 같습니다”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상사로 돌아 왔다.
의상이 돌아가고 얼마후 천공을 가지고 왔다. 왜이리 늦었느냐고 물으니
“정업사 주위에 화엄성중이 너무 많아서 올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도선은
천공을 두었다가 다음날 지상사로 가지고 갔다. “의상스님께서 화엄신장을
거느리고 다니는데 신장이 지상사쪽으로 몰려가자 천인이 천공을 가지고
왔습니다. 스님의 법력은 대단합니다” “오히려 스님께서 날마다 천공을 받아
드시니 큰스님이십니다. 제가 들으니 제석궁에는 부처님 치아가 40개 있다고
하는데 천인에게 부탁하여 어금니 한개를 얻게 할 수 없을까요”
“그러면 7일후에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금니를 도선율사로부터
받았다.
도선율사는 입측5주(入厠五呪)를 만들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스님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내려오다가 옆으로 넘어질뻔 했다.
\'아차\'하는 순간, 누군가가 와서 일으켜 세워 주기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가?\'
\'예, 저는 북방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의 아들 長瓊(장경)입니다.
스님의 계행이 청정하여 항상 모시고 다닙니다.\' \'그렇다면 넘어지기 전에 잡아
주어야 할 것이 아니오.\'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지만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멀리서 모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스님께서 화장실 다녀와서 입측 5주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잘 세정하지 않아서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그 후 도선율사는 호장실에서 입측5주를 빠뜨리지 않고 하였다고 한다.
입측진언(入厠眞言-변소에 들어가면서)
\'옴 하로다야 사바하\' (3번)
버리고 또 버리니 큰 기쁨 있네
탐.진.치 삼독도 이같이 버려
한순간의 죄악도 없게 하리라.
세정진언(洗淨眞言-뒷물 하면서)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3번)
비우고 맑힘은 최상의 행복
꿈 같은 세상을 바로 보는 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
청정한 저 국토에 어서 가소서.
세수진언(洗手眞言-손을 씻으면서)
\'옴 주가라야 사바하\' (3번)
무서운 불길은 물로 꺼진다.
타는 눈, 타는 귀, 타는 이 마음
맑고도 시원한 부처님 감로
화택을 여의는 오직 한 방편.
\'옴 주가라야 사바하\' (3번)
거예진언(去穢眞言-더러움을 버리는 진언)
\'옴 시리예 바혜 사바하\' (3번)
더러움 씻어내 듯 번뇌도 씻자
이 마음 맑아지니 평화로움 뿐
한 티끌 더러움도 없는 저 세상
이 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소원.
정신진언(淨身眞言-몸을 깨끗이 하는 진언)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 (3번)
갓 핀 한 송이 연꽃이런가
해뜨는 창해의 호흠을 본다.
몸과 손을 씻는 이 물 마져도
유리계 흐르는 청정수 되라.
전해 오는 말에 변소에는 측신(厠神)과 담분귀(啖糞鬼)가 있는데, 화장실에
가서 일보고 나올 때는 반드시 입측5주(入厠五呪)를 외우도록 하였다. 들어갈
때는 손가락을 세 번 튕기면서 입측진언(入厠眞言) \'옴 하로다야 사바하\'를
세 번 한다.
이렇게 해야만 담분귀가 똥을 먹다 비켜 준다는 것이다. 만약 입측진언을
외우지 않고 그냥 일을 보면, 미처 비키지 못하고 분(糞)을 그대로 뒤집어
쓴 담분귀가 화를 내면서 밖으로 나와 분을 눈 이의 배에다 발길질을 하여
배탈이 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정진언(洗淨眞言)세수진언(洗手眞言)거예진언(去穢眞言)
정신진언(淨身眞言) 차례대로 염불을 해야 측신들의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지금 중국에 어느 사찰에 가든지 포대화상 뒷면에 장경(위태천, 동진보살)이
모셔져 있다. 위태천은 칼을 들고 있는데
5.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영주 부석사와 삼부석 이야기 그리고 조사당에 선비화 꽃
일본 고산사에 가면 의상과 선묘의 만남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일본의 거지 성자 다이구 료칸(1758~1831) 스님이다. 무욕 생활의 화신이었던
그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떠돌이 걸식 생활로 일관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견지했다. “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식량 다섯 줌 정도이다”라는
말로 알려진 그는 평생 명성을 기피하면서 살았으며 가장 즐겨했던 일은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연을 날리거나 숨바꼭질하는 것이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시절에 그는 그
의 제자이자 역시 시인으로서 자질이 뛰어났던 데이신(1798~1872)과 ‘정신적’
교감을 즐거워했다고 한다.
료칸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에 데이신은 그에게 마지막 시구를 써주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별의 슬픔을 어찌 참겠는가?” “내가 남긴
유물은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 가을이면 단풍잎일세.”
6. 아미타 신앙
고려시대 무기스님의 “석가여래행적송”에 보면 의상의 미타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의상대사는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이 지극하였다. 의상은 專心으로
安養을 구하여 평생 서쪽을 등지지 않고 살았다. 그의 문도 가운데 죄를 범한
비구가 있어 법에 의하여 그를 멀리 보냈다. 그는 다른 곳으로 유행하면서 그
스승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像을 만들어 지고 다녔다. 스승이 그 소식을 듣고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만약 진실로 나를 생각한다면 나는 일생동안 서쪽을 등지지 않고
살았는데 너가 가지고 다니는 상도 감응할 것이다. 상을 서쪽을 등지고
앉혀보라 이에 상이 스스로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앉았다. 스승이 그를
훌륭하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 들였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는 아미타불이 왜 모셔져 있는지 이해가 될것이다.
그것은 불상이 왜 비로자나불이 아닌가하는 문제인데 화엄교학을 공부하신
의상이 아미타불을 모신 것은 이처럼 미타신앙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7. 관음기도(종교적 체험)
의상대사의 관음신앙으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려시대 석익장선사(釋益莊禪師)가
쓴 문집에 기록이 있는데 삼국유사보다 시대가 앞선다고 한다. 이 기록에 보면
“신라의 의상대사가 관음의 聖容을 돌위에 자리를 펴고 예배하였다. 14일 동안
정성을 들였지만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닷속의 東海龍이
받아서 다시 올려 놓았다.
관세음보살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에 두 대나무가 솟아 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그 곳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고 하였다. 龍도 또한 如意珠와 玉을 받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가보니 대나무 두그루가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준 옥으로 상을
조성하여 봉안 했는데 그것이 절이다.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물로
전하게 하였고, 사람들이 이 절에 와서 정성으로 기도 하면 靑鳥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백제의 진표율사 그리고 의상대사보다 조금 앞선 자장율사도 모두
종교적 체험을 보이고 있다.
8. 행행본처 지지발처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간다 간다 하지만 본래 그 자리
닿았다 닿았다 하지만 떠난 그 자리
포교국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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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우리 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 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의상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기록이 전하고 민간 전설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일본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10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이 근세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여인상은 다름 아닌 의상대사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 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자약한 자세로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서기 661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 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는 선묘가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가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서쪽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삼장(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 · 율 · 논)을 배웠다.
지엄은 의상에게 귀국하면 널리 화엄종을 보급할 것을 당부하였고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이상히 여겼지만 나중에서야 용이 된 선묘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 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 선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은 부석, 선묘각(선묘상을 모신 사당), 선묘정, 석룡이다. 절 동쪽에는 선묘정이 있고 서쪽에는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식사용정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은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근세 이 절을 보수할 때 비늘이 새겨져 있는 석룡이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무량수전 앞뜰에서 절단된 용의 허리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 나라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부석의 뜻은 \'공중에 떠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의상대사를 사모하던 당나라 아가씨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큰 바위가 되어 몸을 던져
위험에서 대사를 구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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